DOS에서AI까지 제1화|컴퓨터는 내 친구
《컴퓨터는 내 친구》제1화
검은 화면, 1960년생 청년의 심장을 뛰게 하다
그 시절 우리는 컴퓨터를 ‘콤퓨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름부터 낯설었던 그 기계가 언젠가 내 평생의 친구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삼보컴퓨터나 금성사 매장의 쇼윈도 너머로 보이던 네모난 기계는 평범한 직장인에게 쉽게 손을 뻗기 어려운 고가의 물건이었다. 내가 먼저 손에 넣은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어느 대기업 직원이 세로쓰기로 펴낸 단행본 한 권이었다. 제목은 《컴퓨터는 내 친구》였다.
기계 덩어리에 ‘친구’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순간 마음이 움직였다. 밤마다 모서리가 닳도록 읽으며,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컴퓨터와 대화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책 한 권이 먼저 친구를 소개해 준 셈이다.
마침내 내 방에 들어온 XT
마침내 육중한 XT 컴퓨터가 책상 위에 놓이던 날을 잊지 못한다. 전원을 올리자 냉각팬이 웅— 하고 돌았다. 새 전자제품 특유의 매캐한 냄새까지도 그날만큼은 미래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모니터에는 파란 하늘도, 예쁜 아이콘도 없었다. 칠흑 같은 화면 위에서 초록색 글씨 C:\>만 깜빡였다. 컴퓨터는 무뚝뚝한 얼굴로 이렇게 묻는 듯했다. “그래, 이제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킬 건가?”
첫 대화는 GW-BASIC으로
컴퓨터와 나눈 첫 대화의 언어는 GW-BASIC이었다. 종이에 행 번호를 하나씩 적고, 나중에 코드를 끼워 넣을 자리를 남기려고 10, 20, 30처럼 간격을 두었다. 그 시절 코딩을 해본 사람이라면 몸이 먼저 기억하는 방식이다.
10 PRINT "HELLO, WORLD!"
20 GOTO 10
RUN
오타가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뒤 떨리는 손으로 RUN을 입력하고 엔터키를 쳤다. 순간 화면 가득 “HELLO, WORLD!”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지금 보면 짧고 단순한 코드지만, 그때 내 눈에는 기계가 처음 숨을 쉬는 장면처럼 보였다.
640KB 안에서 벌인 전쟁
컴퓨터는 지금처럼 알아서 척척 해주는 기계가 아니었다. 640KB 기본 메모리 안에서 프로그램 하나를 더 돌리려고 CONFIG.SYS와 AUTOEXEC.BAT를 열어 메모리를 한 줄씩 쥐어짰다. 게임 한 번 실행하려다 운영체제 공부를 먼저 끝내는 날도 있었다.
일요일이면 말썽을 일으키는 이른바 ‘썬데이 바이러스’를 만났을 때는 DOS 명령어로 날짜를 월요일로 바꾸어 컴퓨터를 달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기계와 벌이는 진지한 두뇌 싸움이었다. 하드디스크를 끄기 전에는 PARKING.EXE로 헤드를 안전한 위치에 옮겼고, 5.25인치 플로피디스크는 자석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보물처럼 모셨다.
검은 프롬프트에서 AI 프롬프트로
그 검은 화면에서 DIR/W를 치고 플로피디스크를 아끼던 청년들은 이제 중년과 노년이 되었다. 세상은 챗GPT와 생성형 AI를 이야기한다. 변화가 너무 빠르다며 겁부터 내는 동년배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 세대에게 특별한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AI에게 입력하는 ‘프롬프트’는 과거 C:\> 뒤에 입력하던 명령어와 닮았다. 원하는 일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컴퓨터도 제대로 움직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기계어가 아니라 평범한 우리말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에게 길을 안내하고 결과를 기다리던 옛 손맛을 기억한다면 AI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몸집이 커지고 말귀가 훨씬 밝아진 새 친구일 뿐이다.
《컴퓨터는 내 친구》 한 권에서 시작된 나의 컴퓨터 연대기는 COBOL을 거쳐 사무실 네트워크 구축으로 이어졌다. 다음 화에서는 명동 골목을 누비며 무역회사들의 컴퓨터를 살려내던 ‘명동의 맥가이버’ 시절로 돌아가 보려 한다. 그 시절 컴퓨터를 친구로 삼았던 동년배들이여, AI라는 더 영리한 친구를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